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문단 편집) == 소비에트 러시아의 참패와 굴욕적 협상 == 그러나 러시아 혁명 자체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지쳐버린 군대와 국민들의 항명으로 벌어진 사건인 데다 소비에트 러시아는 아직 제대로 성립되지도 않은 국가라[* 소련은 볼셰비키의 내전 승리 이후 1922년에 건국되었다.] 힘이 너무나 부족했다. 독일은 훗날 2차 대전 당시의 전격전을 연상시키는 속도로 우크라이나 등 러시아의 지배 하에 있던 동구권 국가들을 세력권 내로 넣으며 파죽지세로 동쪽을 향해 진군했다. 당시 독일군의 전략은 '''[[기관총]]병을 기차에 태운 후 수시로 내려서 해당 지역의 공산당 간부들을 사로잡고 다시 [[기차]] 타고 진군'''하는 것이었다. 말 그대로 철도 진군이었다. 소비에트 러시아는 이 정도의 군대조차 요격해 섬멸하기는 커녕 당장 수도를 지킬 군대도 없었다. 이 결과 소비에트 러시아는 '''약 220만 ㎢의 영토를 상실했다'''. 참고로 [[한반도]]가 약 22만 ㎢라서 10배 정도의 면적을 잃어버린 것.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280px-Germany_future_1917.jpg]] [[9월 계획]]에서 계획된 독일령. 가히 [[독소전쟁]] 전성기와 맞먹는다. 실제로 이 지도대로 실현 되었다면 러시아는 동쪽에서의 [[발트해|바]][[흑해|다]]를 완전히 잃는다. 사실 [[캅카스]] 지역까지 독립시킨 것을 생각하면 사실상 이를 반쯤은 실현했다고 봐도 된다. 다만, 그게 독일 통제 안에 있었던 건 아니었다.[* 여담으로 [[카이저라이히]]에서는 독일이 승전국이 된 덕에 이 판도를 간접적으로 구현하는 데에 성공한다. 물론 독일 제국 영토는 아니고 해당 영토의 국가들 중 발트 연합 공국, 리투아니아, 백루테니아, 우크라이나, 폴란드를 독일의 동방주로 만들고, 핀란드, 조지아, 아제르바이잔을 독립시켜 독립을 보장한 다음 발트, 리투아니아, 백루테니아, 우크라이나, 폴란드를 라이히스팍트라는 국제기구의 회원국으로 만든다.] [[파일:Septemberprogramm.png]] 춘계공세에 상당수의 병력을 동원해야 했기 때문에 핀란드와 캅카스 지역을 지배한 적은 없다.[* 다만 캅카스는 얼마 뒤에 [[오스만 제국]]이 캅카스 국가들을 침공하면서 일시적으로 점령하고 핀란드는 독일의 지원을 받는 [[핀란드 왕국|백군]]이 [[핀란드 내전|내전]]에서 승리하여 독일의 영향권에 든다.] 독일은 동유럽에 완충지대를 만들 것인가, 소비에트 러시아를 최대한 약화시키고 동유럽을 관할할 것인가 고민한 끝에 결국 후자를 선택하여 소비에트 러시아에게 굴욕적인 조약을 강요했다. 그러는 동안 레닌을 위시한 즉시 강화파가 소비에트 러시아의 주도권을 잡으면서 소비에트 러시아는 독일의 요구 조건을 모두 수용하는 조약을 맺게 되었다.[* 1918년 3월 3일] 그러나 워낙 조약 내용이 치욕적이었던지라 볼셰비키 중 [[레프 트로츠키|트로츠키]] 같은 고위 인사들은 조약에 자신들의 이름을 넣는 것을 거부해 실제 조약에 서명한 러시아 인물들은 급이 낮은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볼셰비키들은 여전히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소비에트 러시아는 뒤에서 몰래 전 세계를 향해 공산주의 홍보 활동을 벌였고 전쟁이 길어지면서 지친 사람들이 속출해 당시에는 러시아 뿐만 아니라 유럽에 전체적으로 사회주의가 퍼져나가기 시작했던 때였다. 이에 고무된 볼셰비키들은 '''어차피 우리가 혁명 일으킨 걸 보면 다른 나라들에서도 공산 혁명이 일어날 테니 이 조약은 금방 무효가 될 것'''이라 생각하였다. 이 조약이 얼마나 가혹한 것이었냐면, 러시아 유럽 영토의 절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전쟁 전의 모든 영토와 비슷했다.], 인구는 5,600만명[* 전쟁 전 러시아 인구의 1/3], 석탄 산업의 90%, 철강 산업의 70% 이상, 산업의 54%, 철도의 26%를 넘기는 것이었다. 산업 비중이 석탄과 철강에 비해 적다고는 하지만 저 정도면 나라 하나 망하는 수준인데다가 근대의 핵심인 석탄과 철강이 대부분 빠진다는 것은 망하도록 방치한다는 것과 다름 없었다. 독일 패전 뒤 [[베르사유 조약]]에서 [[협상국]]이 독일에 강요한 조건도 가혹했지만 이 조약은 그것보다 더 가혹했다.[* 물론 베르사유 조약에서 독일은 러시아가 내야 했던 60억 마르크 보다 훨씬 많은 1,320억 마르크를 지불해야 했지만 인구의 대부분이 게르만족이이었기에 분할시킬 명문이 없어 영토와 인구가 상당히 보존되었다. 이후 상황을 봐가면서 [[영 안|배상금도 낮추는 등]] 협상국은 어느정도 사정을 봐주는 편이었다.] 사실 트로츠키 등의 예상이 아주 틀린 것만은 아니었다. 독일의 국력도 당시 거의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으며, 결과적으로 제1차 세계 대전 말기에 이르면 [[독일 혁명|독일이나]] [[헝가리 평의회 공화국|헝가리에서도]] 혁명이 일어나 각지에서 러시아식의 소비에트가 생겨나게 된다. 결과적으로 브레스트 리토프스크 조약은 폐기되었고, 러시아는 이를 무효로 선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다른나라에 생긴 소비에트는 정권 장악에 실패했다. 정작 독일은 이 조약으로 동부전선에서 많은 것을 챙겼지만 이 과정에서 [[동맹국]]들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불가리아 왕국]]의 협의 없이 독단적인 조약을 맺은 데다 조약 내용도 독일에게만 콩고물이 떨어지는 내용이 많아서 오히려 동맹국의 결속에는 악영향을 가져왔다. 게다가 군 수뇌부가 생각없이 동유럽에 영향력을 확대하려 한 결과로 독일군은 동부 유럽의 광대한 영토의 치안까지 책임져야 했고, 원래 계획했던 것보다 많은 병력이 이 지역에 묶였다.[* 조약 실행과 치안 유지를 위해 주둔시켜야 했던 병력이 약 110만 명으로 추정된다.] 이 모양이니 동부전선을 정리한 후 남는 잉여병력으로 서부전선을 보강하려는 계획도 크게 틀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정작 [[루덴도르프 공세]]에서는 병력들을 제대로 동원하지 못했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체결은 몰다비아에서 동맹국에 항전하던 [[루마니아 왕국]]도 절망하게 만들었다. 이미 1917년 11월 9일 동맹국과 정전협정을 체결한 루마니아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체결로부터 두달 후인 5월 7일 [[부쿠레슈티 조약]]을 체결하여 전쟁을 끝냈다. 해당 조약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보다 더 가혹한 조약으로, 루마니아를 사실상 동맹국의 반식민지로 전락시켰다.[* 단 소비에트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루마니아도 이 조약이 실현되는 일은 없었다. 몇달 후에 동맹국 진영이 망해버렸기 때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